우리는 시편에서 시편기자가 좋지 않은 상황을 나아가야 하는 현실을 자주 발견합니다. 그가 자주 비탄에 빠진 채로 하나님께 향하는 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째서 나를 잊으셨습니까? 어째서 내가 비탄으로 나아가야 합니까?” 그는 원수가 날마다 찾아와서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며 조롱하는 것에 대해 한탄했습니다.(참조 시편 42:9) 그러나 시편기자는 또한 스스로 자신에게 답변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째서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네 희망을 하나님께 두어라. 나는 내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시편 42:11-현대인의 성경)
나는 많은 충실한 구성원들이 이러한 그리고 유사한 상황을 거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좋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부당한 일을 당해야 하고, 힘겨운 시련을 겪으며 살아야하고, 질병과 수난을 참아야 합니다. 이런 순간에 우리들 중 누군가는 의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하나님, 어찌하여 지금 당신께서는 저를 잊으셨나요? 내가 무엇을 잘못 했습니까? 당신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심지어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우리에게 다가와서 “그런데. 너의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는가? 너의 믿음이 유익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우리에게 “희망을 하나님께 두라!”고 답하십니다.
희망을 하나님께 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확신으로 굳건히 남아 있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것 그리고 우리가 볼 수 있는 어떤 것들이 우리에게 불리한 현상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라는 확신을 굳건하게 유지합시다! 이것이 희망을 하나님께 두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도 유사한 상황을 걸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그분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에게 닥쳐오는 일들을 더욱더 현실화하셨습니다. 결국, 그분은 진정 인간이셨고 진정 하나님이셨습니다. (참조 교리서 3.4) 그분께서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아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일 때문에 이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그 순간 예수님께 놓인 무거운 짐을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곤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참조. 요한복음 12:23-28 새번역)
우리가 불의나, 재난, 고통의 매우 어려운 경험이 시작되거나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헤치고 나가고 있을 때, 우리의 최초의 생각은 대게 “주여,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분의 도우심이 가시화되지 않으면, 우리는 더욱 고뇌로 지쳐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의문이 일어납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주님의 삶에서 이러한 순간에 그분은 그분의 목표에 전념하셨습니다. “이 시간이 내가 애초에 내가 온 이유다!.” 우리의 깊은 곤궁의 시간에서도, 우리는 항상 우리자신에게 질문 합시다. “나의 목표가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임무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는 무엇을 목적에 두는가?” 그러면 답변이 또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가고 싶다. 나는 하나님과 영원한 친교를 가지고 싶다. 그것이 내가 여기 있는 이유이다!” 어째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까? 그것은 증거하기 위해서 세상으로 나아가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주님을 향해 충실함으로 남아있을 것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의 본성이요, 의의고, 목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남아있고, 그분을 따르며 그리고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 라도 우리의 목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나는 집에 가길 원합니다. 나는 아버지께 가길 원합니다. 나는 주 예수님과의 영원한 친교를 원합니다!”
사도장의 예배말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