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한글 찬송 ‘하나님 사랑 – 390 장’)” 우리 중 어린 시절에 이 찬양을 불러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짧지만 이목을 끄는 짧은 표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중대하며, 이해하기 어렵고,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인간의 생활에 필요하고, 창조물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는 것에 필요한 공간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죄에 빠짐으로 인해 인류는 낙원에서 하나님과 나눴던 친교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죄에 빠진 사건에서도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분께서 구원자를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7절 이하 참조)
계약에 따른 사랑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주로 그분의 백성들에 대한 사랑으로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이는 자유롭고, 선택이 가능한 사랑이었습니다. 누구도 그 사랑을 자칭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수가 많아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보살피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수가 당대 다른 곳에 비해 적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신명기 7장 7-8절) 그들을 택하시고, 보살피신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의 여러 구절을 비교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아내를 사랑하는 것처럼,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호세아 2장 18절, 11장 1절, 신명기 14장 1절, 32장 6절) 그리고 어미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이사야서 49장 15절, 66장 13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대가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주님이신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온 영혼을 다해, 온 힘을 다해 (신명기 6장 4-5절) 사랑해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계약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히브리어 b’rit (영어로는 계약, 협약, 조약의 뜻을 지님)은 법률 용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계약을 지키고, 계약의 세부사항을 범하지 말라는, 다소 정치적인 지시였습니다.
계명을 위한 사랑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구체화되었습니다. (신명기 10장 12절 이하 참조) 왜냐하면 모세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신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호하셨고 (사사기 5장 31절, 시편 31편 23절, 145편 20절), 지지하셨고 (시편 91편 14절), 그분을 사랑한 이들에게 자비를 보이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 응답 받지 못하던 사랑은 철회되었습니다.
물론 계명은 의무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표현을 보여줌에 분명했습니다. 계명들은 그것을 지키는 이들의 삶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한 가지 답변은,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서로의 관계를 정의했던 것이 바로 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었기도 합니다. (레위기 19장 18절) 그럼에도 낯선 이들과 이 사랑을 나눠야하기도 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9절)
사랑이 있는 곳에 질투가 있다.
사랑을 법적으로 이해한 것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혼인이라는 비유를 이끌었습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이 점을 극적인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호세아는 신실하지 못한 이들, 간음한 이들, 매춘을 범한 이들을 규탄했습니다. (호세아서 1장) 이 예언서에서는 하나님의 질투에 대해 설명하고, 이스라엘의 변절에 대한 맹렬한 분노를 설명했습니다.
호세아는 사랑의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하고 강렬한 사랑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 사랑은 늘 하나님의 분노보다 더 위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호세아 14장 5절)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은, 이후 중대한 발전을 일으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그분의 사랑을 배타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멀리 계시고, 보이지 않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보게 된 것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9절) 예수님의 공생애, 가난하고 약하고 거부당한 이들과 죄인들에 대한 그분의 염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눈에 보이게 되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계명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사랑에 대한 구약의 개념을 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가장 위대한 계명이라고 공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을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계명(레위기 19장 18절)으로 연결시키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9절) 이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이중계명(the double commandment)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이와 같은 율법에 대한 지칭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유대 전통을 확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유대인에게도 보내심을 받은 것이라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비유대인에게 치유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5절 이하, 19장 21절 이하 참조) 예수님의 행적은 따라서 이미 유대 민족을 넘어 확장된 하나님의 사랑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선한 사라미라인의 비유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웃이라는 용어의 범위를 넓히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의 특별한 형태로써,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있던 이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3-48절)
영원한 사랑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메시지로 끝을 맺습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인간의 수준으로 맞추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을 사셨고, 사랑하셨고, 고통을 받으셨고, 십자가 위해서 육적인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배타적인 사랑을 떠나, 이제는 민족성과는 관계없는 인류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이 초점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사도 바울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고, 뗄 수 없는 하나의 관계로 보았습니다. 어떠한 것도 인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39절) 이것은 하나님의 은사로, 인류는 이에 대해 사랑으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높은 덕목으로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거룩한 사랑의 노래를 설명했고, 찬양했습니다.
사랑에 대한 신약의 호소는 최대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행하라는 권면입니다. 인류는 사랑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요한1서 4장은 사랑의 신학을 언어로 발전시켰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사랑으로 식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누구든 사랑 안에 거할 때,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요한1서 4장 16절)
<영문 참조 : http://nac.today/en/158033/589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