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떠한 법전도 하나님의 십계명만큼이나 인류의 문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계명”이라는 용어는 “지침”을 뜻하는 히브리어의 번역어입니다. 십계명은 그래서 인간을 위한 명령과 지침으로 주어졌습니다.
10월 새 사도 교회 예배의 주요 주제는 십계명에 관한 내용들을 다루고 인류는 그것을 어떻게 따르는지에 관해 다룹니다. 십계명은 (희랍어에서는 ‘열 가지 말씀’이라는 뜻을 지닌 데칼로그(the Decalogue)라는 단어로 표현함) 역사가 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까지도 의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언어로 인간에게 주신 처방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주로 메신저들을 통해 인류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내용, 신학, 윤리의 관점에서 10가지 개명들은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에게 막중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 계명들은 수 천 년 간 지속되었고 인류 문화사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땅에 오신 뒤, 하나님의 계명들은 인간의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로고스)이시자, 그분께서 인간의 존재로써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진정한 인간이자 진정한 하나님으로써 스스로를 계명의 대상이 되셨고, 계명을 해석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의 새로운 해석은 인류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어기더라도, 다시 모든 것을 올바르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원과 구속은 파괴하는 것과 심판하는 것과 반대 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한다 – 하라 – 하지 말라 – 무언가를 하면 재난이 있으리니
계명은 인류에게 언제나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사실, 모든 이들이 계명의 존재의 필요성을 수궁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편협과 강제라는 불편한 감정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누가 무엇인가를 꼭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기쁘게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세상이 규칙 없이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새로 태어난 아기 때부터, 규칙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의 삶에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들은 최첨단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삶에 계속해서 존재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민법, 형법, 교통법, 주택법, 소통법, 통화 상업 법이 있고, 구매에 관련된 법도 있습니다. 글로 써지지 않은 법들도 있습니다!
나는 …
첫 번째 계명은 계명 중 유일하게 1인칭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스스로를 소개시키십니다. “나는 …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곧바로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습니다. 당시, 사막에 있던 사람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방향성을 잡았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유일신을 확장하였고 결국에는 많은 다른 신(우상)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러한 신들은 오늘 날에도 존재합니다! 오늘 날,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많습니다! 이러한 우상들은 진정한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을 방도를 모색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오랜 불신이 오늘 날에도 여전히 조용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전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을 꼭 붙잡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직 그분께 영광을 바치고, 오직 그분만을 신뢰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첫 번째 계명을 오직 계명으로써만이 아니라 신앙으로써 듣게 됩니다. 그리곤 개개인에게 “미신에서 돌아서서, 의심을 극복하고, 그분을 당신의 삶과 생각에 두라!”고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의 삶의 고삐를 쥐고 계신 분은 오직 하나님, 우리의 주님, 하늘의 아버지뿐이십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세 번째 계명 역시도 계속해서 그 상관성을 유지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이 계명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경험하고,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과 부활을 고백함으로써 주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우리의 교리서에서는 “믿는 이들은 예배에 참석함으로써 예수님의 구원의 행적에 대한 감사함을 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에 대한 간절함의 표현을 담기도 합니다.” (새 사도 교회의 교리서 5.3.4.5, 비공식 번역) 직업적 혹은 여타 이유로 예배 참석이 힘든 이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중과의 관계를 모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끌어당겨주시고 그들에게 평화, 위로, 강건을 허락하십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이것은 특히 우리 시대에서 자주 논의되고 있는 거룩한 가르침입니다. 누군가는 이 계명을 놓고 질이 아닌 양의 개념을 주제로 논의하길 선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정도의 도둑맞은 물건의 양이 우리를 도둑으로 만드느냐의 관점이 아니라, 도둑질 그 자체의 행위를 뜻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왕국으로 자기 자신의 초점을 맞춰나가는 이들은 “도둑질”하지 않습니다. 즉 이웃으로부터 그 어떠한 것도 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복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이웃의 신앙을 신장시키기 위한 방법 역시도 모색하고 더불어 이웃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고인을 위한 예배의 준비
10월의 마지막 예배에서 회중들은 고인을 위한 예배를 위해 스스로를 준비할 것입니다. 이 고인을 위한 예배는 11월의 첫 번째 예배로 계획되어 있습니다. 그 때 회중은 주님의 복음에 입각해 고인들과의 밀접한 유대감을 기념합니다. 이 예배가 있는 날, 유럽의 모든 회중은 요한복음 16:22 “…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의 말씀으로 섬김을 받을 것입니다.
<영어원문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