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 많은 갈등들. 채식주의자들은 육식을 하는 이들과 부딪히고, 사람들은 서로 다른 정치 견해로 다투고, 세계의 종교들은 서로 충돌하며,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억누릅니다. 그렇다면, 평화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기든 지든? 인간관계에 있어 종종 따라붙는 말입니다. 새로울 것은 없지만, 현대 시대의 현상은 결코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 회중을 예로 들면, 음식에 관한 율법을 두고 분쟁이 있었습니다. 문제가 될 때, 예인가 아닌가? 지속 가능한 해결책에 대한 맹렬한 싸움과 그 해결책을 간구하는 과정에서 더 큰 소동이 일었습니다. 회중은 함께 모였고, 모두가 올바르게 있길 원했습니다.
결국 사도들이 내면의 결합을 위해 힘썼습니다. 겉모습에서 비춰지는 모습 보다 젊고 생기 있는 회중을 위해서는 평화로운 공존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리곤 다양성의 연합이라는 가설이 태어납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 안에서, 개인을 고려하지 않고, 신앙의 지붕 아래 있다는 것에 선을 느꼈습니다.
화냄은 평화를 죽인다.
그러나 오늘 까지도, 인류는 여전히 이 점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개인적 이해관계가 많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으로 인한 시끄러운 논쟁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소유는 여전히 우리에게 너무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평화라는 대안이 있습니다. 바로 9월 새 사도 교회의 예배 말씀의 주요 주제입니다. 말씀들은 회중들에게 내면과 외면의 평화는 무한히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켜줄 것입니다. 이뤄지지 않은 기대사항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관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사이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회중은 거룩한 평화를 보존하라는 당부를 받습니다.
예수님, 걸려 넘어지는 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구체적인 것을 위해 소망을 품거나, 기대했던 일로 인해 실망해본 적 있는 이들에게 그렇습니다. 잘못된 희망은 이러한 이들을 심판이라는 실수로 이끌었습니다. 진리를 향한 예수님의 애착이 이러한 사람들을 분개시킵니다. 누군가는 걸려 넘어지기까지 합니다. 그분의 제자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누가복음 7: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람들이 갈릴리에서 평화의 사람을 죽음으로 내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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