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국제 소식
요한의 세례인가, 예수의 세례인가? 차이가 있을까요? 예, 큰 차이가 있고 한때 이 차이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회개의 세례로 세례를 베풀었고, 다른 한 사람은 구원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행한 세례를 바울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나눈 대화에서 그것을 회개의 세례라고 했습니다. “또 이르시되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위하여 세례를 받았느냐 하시니 그들이 이르되 요한의 세례니라” 그러자 바울은 “요한이 참으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백성에게 이르되 자기 뒤에 오실 이를 믿으니 곧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라 하더라”(행 19:3-4)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오늘날 교회들이 기독교의 시작 성례로 거행하는 성사가 아니라 인간의 회개의 표현이었습니다. 바울이 요한은 자신의 위치, 즉 자신이 메시아의 선구자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고 기록한 것은 옳습니다. 그의 증언은 매우 설득력 있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마태복음 3:5). 그는 그럭저럭 많은 군중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 예수님을 위해. 그의 계획은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그[예수]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한복음 3:30). 그러나 그는 단순히 광야에 사는 고행자나 은둔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확실히 영향력과 이름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내적인 태도의 표현으로서 회개.
회개하기 위해 설교하려는 그의 주장은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먼저 적용되었습니다. 그는 그가 설교한 것을 실천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교화적인 무엇이었습니다. 그것은 과잉과 퇴폐에 대한 경고로 특징지어졌습니다. 그 자신은 금욕적인 삶을 살았고 사치에 탐닉되지도 않았습니다. 어쨋든 이것은 1세기 후반의 유대 역사가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쓴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그토록 많은 추종자들을 갖게 된 한 가지 이유 중 하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말과 행동의 일관성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요한이 광포한 죽음을 당한 후에도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계속해서 생겨났고, 아마도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에베소, 즉 소아시아에도 추종자들이 계속 생겨났을 것입니다. 이 고대 일신교인 중동 종교인 만다이아인은 지금도 여전히 남부 이라크와 이웃 이란에 존재합니다. 오늘날 만다이아인들은 호주와 스웨덴에 큰 공동체와 함께 흩어져 있습니다. 그것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복잡한 정화 의식과 금욕적인 생활 방식입니다.
구원의 성례전로서의 세례.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활동 시작과 동시에 요한에게 가셔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정화 의식 행위의 구속력과 동시에 메시아의 새로운 사명을 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일을 먼저 하고자 하는 사람은 일종의 표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늘에서 직접 온 말씀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어라!”
물로 세례를 하며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세례는 나중에야 기독교의 성례전이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몇 세기가 흘렀습니다. 오늘날 세례는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연결입니다. 원죄를 씻어냄으로써 세례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가까이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들의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통하여 세례 받은 사람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게 됩니다.
이것은 기본입니다. CNAC(새사도 교리서) 8.1.3에서 성세례는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선언되어 있습니다. “물이 있는 성세례는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완성하는 첫걸음입니다. 그러므로 물로 받는 거룩한 세례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에 이르는 길을 열어줍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로서 이해되는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구원의 행위입니다. 기독교의 세례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인 당신의 가까이 있음을 보증하십니다.
마지막 일의 시작.
세례가 구원에 이르는 길의 출발점이기는 하지만 그 목표는 이미 그 안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6장에서 발전된 중심 주제입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죄의 권세에 대하여는 죽은 자”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 안에서 그와 같이 되었다면 그분의 부활 안에서 또한 그분과 연합하여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서 걷게 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