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성령강림절 슈나이더 수석사도께서는 성령님의 권능에 대해 설교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권능은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하나로 합쳐줄 수 있습니다. 현대의 기독교인에게도 역시 계명과 같은 것입니다. (2020년 7월)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이자, 기독교 계명이 오늘 날 가르치는 점이기도 합니다. 말은 쉬우나, 이를 실천하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해와 기독교적인 사랑이 필요하며, 단순한 관용 이상이 필요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화합과 내면의 교제가 지닌 가치를 인식할 때까지 극적인 경험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모든 종류의 부정한 동물이 담긴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그 음식을 먹으라는 명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유대인은 음식과 관련된 율법에 따라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동물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자기 자신과 회중을 새로운 시대로 안내하길 원했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전의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고, 베드로는 자신의 지평을 옮겨 새로운 빛을 통해 그 사안을 재고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새로운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국가보다도 위대하시다
바로 그때 이방인 사역이 공식화되었습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르침이 대상하는 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로마인, 그리스인, 사마리아 및 다른 여러 민족들에게도 해당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비유대인을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몇 제곱미터 되지 않았던 예루살렘은 문화의 도가니로, 여러 문화권이 이곳에서 충돌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과 갓 입교한 기독교인으로 이뤄진 회중은 그 중간에 있었습니다. 갑자기 경계를 열고 지평을 넓힐 것을 권면하는 하나님의 권고가 있었습니다. 수 천 년 동안의 가르침과 달랐던 것입니다. 영원한 율법에 대한 엄격한 해석의 여지가 느슨해진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수석사도께서는 성령강림절 예배 말씀에서 “내 생각에 우리는 유대인, 이방인, 로마인, 그리스인 사이에 존재했던 간극에 대해서 서투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유대인과 비유대인은 서로 분리된 세상에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이 속했던 국가와는 매우 동떨어진 윤리적 구획을 구성했습니다. 유대교는 종교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국민성, 문화, 전통, 공유된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토라-모세오경-를 증거 하는 이는 모두가, 토라의 해석본인 탈무드를 받아들였고, 랍비의 말씀을 듣고, 유대인 어머니를 둔 유대인이었습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이 멈춰지는 것일까요? 이러한 차이점들, 사람들이 깊게 심취해 있던 것이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않는 것일까요? 유대인 기독교인은 로마인 혹은 그리스인 기독교인과 동등한 발자취를 취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많은 이들에게 있어 이것은 상승이 아니라 하강과도 같았습니다.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이뤄진 이에 대한 논쟁은 사도행전에서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의 신앙은 묶어져야 한다.
로마인, 그리스인, 이방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른 신을 숭배했던 다신교 신자들이였습니다. 이를 부드럽게 표현하면 그들의 도덕성은 아쉬움이 많이 남았으며, 그것은 그들이 게으르고, 살인을 저지르고, 약탈을 일삼고, 매춘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약한 버전 같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서로 다른 차이점이 수렴된 이 곳,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새롭고 그리고 연합된 사람들을 모을 것을 요구 하셨습니다. 수석사도는 성령강림절 예배에서 강조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을 생각해봅시다. 처음에는 유대인이 있었지만, 이후 이방인들이 들어왔습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유대인, 이방인, 로마인, 그리스인 사이에 존재했던 격차에 대해서 서투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 문화, 종교에 있어 수 세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른 민족들의 경우 여러 방면에서 이와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제 하나가 되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룻밤 만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구세주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오늘 날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슈나이더 수석사도는 “내 생각에 이러한 격차는 오늘 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격차만큼이나 큰 것이었을 겁니다. 오늘 날 우리는 사회적 배경, 문화, 세대, 성별, 성적 지향점에 기반을 둔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이 격차는 너무 큽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격차가 독실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격차보다 더 크다고 믿지 않습니다.”
차이점을 극복하는 것
수석사도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성령님의 권능을 통해 이러한 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한 일을 오늘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루는 다양한 구성원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특출한 재능을, 누군가는 중요한 임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은, 각 구성원이 주님의 눈에 보시기에는 다른 누구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재능은 다양합니다. 임무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각각의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같은 가치를 지니며, 우리에게도 같은 가치를 지녀야합니다.”
수석사도는 다음의 호소를 남기셨습니다. “함께 모입시다. 우리는 차이를 극복해야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극복해야 하며 모두의 행복에 기여해야합니다. 우리는 각각의 모든 구성원을 같은 방식으로 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