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영생을 어디에서 보내시겠습니까?” 표지판에 쓰인 이 질문은, 새 사도 교회 오스트리아의 태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올 해 성령강림절 축전의 주최국에 대해 잠시 살펴봅니다.
이 표지판은 요세프 할라위스츠 소유의 한 상점에 서 있었습니다. 요세프는 집사였고, 프리드리히 크레프 사도에 의해 1885년 비엔나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요세프 집사는 사람들을 대화로 이끌고자 했습니다. 강화의 목적으로 사제들이 이따금식 보내심을 받긴 했지만, 요세프 집사는 가정 회중이라는 무대를 넘어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 1차 대전 이후, 가톨릭 제국 왕조가 공화국으로 변할 때 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모든 거주자들은 자유로운 신앙, 종교 활동 및 종교 선택의 공적, 개인적 고백이라는 권리가 있다.” 이것은 종교의 보편적 자유를 허용한 새로운 헌법에 나온 조항입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한 공화국
마틴 트링크스는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복음자였던 마틴은 1914년 드레스덴에서 오스트리아로 이주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 때문에 교사로써의 직업으로 활동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잡화점을 개업합니다. 새로운 종교의 자유는 마틴 트링크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직업적인 측면만이 아니었습니다. 마틴은 사립 학교에서 일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마틴 복음자는 이제 학교 건물의 5층에서 예배를 집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가정에서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마틴은 어마어마한 열정을 세우게 됩니다. 말씀을 전하고, 하나됨의 역할을 수행하고, 예배에 사람들을 초청하기 위해 힘써 일했습니다. 그리고 1922년, 훌젤 사도는 드디어 오스트리아의 첫 번째 사도 직분을 안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로의 지역에서 사도의 지역으로
1936년경 오스트리아 교회는 크게 성장하게 되었고 교구의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기 5년 전, 요한 고트프레이드 비쇼프 당시 사도장께서는 로버트 그레슬리에게 독일의 오펜바흐에서 오스트리아로 이주할 것을 요청했고, 로버트는 지역 장로로 안수를 받습니다.
당시 지역장로와 함께 성단에 섰던 젊은 집사 막스 구르트너는 19년 뒤 오스트리아의 첫 번째 현지 사도가 됩니다. 이전까지 스위스의 사도들이 오스트리아의 구성원들을 보살폈습니다. 훗날에도 그런 시기가 있었습니다. 1972년 세상을 떠날 때 까지, 구르트너 사도는 이탈리아, 헝가리, 발칸 국가들, 폴란드 지역의 구성원들을 위한 보살핌도 책임졌습니다.
특별한 권리와 의무
1975년 이후 새 사도 교회는 오스트리아 내에서 인정받는 교회가 됩니다. 공립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할 수 있는 권리뿐만 아니라 특별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인정을 받고 있는 교단의 종교적 교리의 공적 명예훼손이 법적 처벌 대상이 된 것입니다.
오늘 날, 스위스의 필립 부렌 사도와 오스트리아의 피터 제람 주교는 250여명의 교역자와 함께 오스트리아 내 50개 회중의 5000여명 구성원을 보살피고 있습니다. 은퇴하신 루돌프 카인츠 사도가 교회의 대표자로 있습니다. 다른 교회와 국가 당국에 대한 새 사도 교회 오스트리아 대표자를 맡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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