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자연 과학자이자 확신에 찬 무신론자였어요. 그런 제가 여기서 뭘 하고 있을까요? 저는 왜 예배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을 까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이렇게 꼭 들어맞을까요?” – 독일 남부 교구의 스타이넨 출신인 카티아 크룸이 신앙으로 향하는 자신의 여정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언제 위로해 주실까’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다가, 시력조차 잃었습니다.” (시편 119:82) 2009년 6월, 44살의 나이로 제가 세례와 인침을 받은 예배의 주제 말씀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딱 한 해전, 2008년 3월 처음으로 새 사도 예배를 경험한 뒤 일어났습니다. 당시 저는 확신에 찬 무신론자였습니다. 그 일 년이 제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바꿔놓았습니다.
나의 지성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
예배에 참여했던 이유는 어둡고, 슬프고, 겉보기에 희망이 전무했던 때였습니다. 저와 매우 가까웠던 한 사람의 급작스런 죽음이 모든 것을 전부 바꿔놓았습니다. 장례식이 있고 이틀 후, 저는 위로를 찾기 위한, 설명할 수 없는 충동을 따랐고, 세 글자, NAC(새 사도 교회의 약자 – 번역자 주)를 찾았습니다. 그 얼마 전 직장 동료로부터 이 NAC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저는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우연치 않게 당시 예배는 사도 직분이 인도했습니다. 살아 있는 예배 말씀과 환상적인 성가대가 제 마음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제 주위의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와, 따뜻하게 말을 걸어주고, 다시 또 교회에 나오라고 초청해주었습니다. 행복한 마음과 어떠한 편견도 없이, 그들은 자신들에게 중요한 것을 저와 함께 나눴습니다. 그 중요한 것은 바로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행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는 실제 단 한 번의 예배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초반 몇 번의 예배는 분명 많은 물음표로 가득 찼습니다. 나는 회의감에 찬 채로 새로운 용어들을 배웠습니다. 이를 테면, “신부를 준비하는 것,” “고인들,” “축복의 그릇들,” “중재,”와 같은 단어들이 있었습니다. 찬양과 음악만으로도, 나는 한두 가지 모종의 답변을 얻었다고 느꼈습니다. 나의 지성이 저항하는 만큼, 올바르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노래하는 것–안도와 이해의 표시
이전의 렉터(교회 책임자) 내외께서 자택으로 저를 초청해주셨습니다. 많은 의문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였습니다. 제 질문들은 꾀 도발적이고, 반항적이고, 의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의문들은 사랑으로 가득 찬 답변으로 채워졌고, 그것으로 발판삼아 저는 더 멀리, 그리고 깊게 나아갔습니다. 저는 자발적으로 회중의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가대 연습, 생일축하, 청소팀, 신년 이브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내 의문들을 위한 공간을 부여받았고, 그 공간에 대한 답변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나를 미소 짓게 했던 구성원들의 신실함이 거룩한 섬김에 있어 한계가 없다는 것에 주목한 일은 나에게 매우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신앙의 신도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단련하기 위해서, 어떻게 그러한 확신을 겸비했는지 목도했습니다.
저에겐 노래하는 것이 모종의 자유였고, 안도의 한 숨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노래하는 것이야 말로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나를 찾기 위해 쓰신 방식이자, 나를 사로잡기 위해 쓰신 방법이었습니다. 더불어 오늘 날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기 위해 쓰신 방법이었습니다. 제가 말씀의 의미를 신앙으로 이해할 수 있기 훨씬 전, 노래하는 것을 통해 말씀의 의미를 느꼈습니다.
가슴에 와 닿음: 조각들이 함께 모이다.
내 안에서 고요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잔잔한 평화, 행복, 그리고 받아들임. “가슴에 와 닿다.”-저는 첫 한 달 간 회중에서 보낸 시간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을 가졌고 “내가 정말 이 신앙을 받아 들여야 할까?”라고 물었습니다. 결국 그때까지만 해도, 철저히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삶을 단련시키려고 했던 것이고, 수 년 동안 활발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해 왔던 것이며, 내가 알던 기독교인들을 용인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조용히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회중 안에서 응답을 해주셨습니다. 한 지역장로의 미망인이신, 활발하고, 사랑이 넘치며, 재치 있는 자매를 만났습니다. 강한 신앙을 겸비했고 성경을 깊게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모호한 용어인 ‘신앙’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개인의 차원에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 자매님을 통해서였습니다.
제 이전 삶의 경험, 기억, 가치관들의 형형색색 조각들이 명백하고 간단한 형상으로 보여 지기 위해, 올바른 장소에 놓여 진 것도 그녀 덕분입니다. 나의 내면의 존재를 향한, 그 존재에 대한 의문은 나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에 대한 짧은 의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무가치한, 불완전한, 그리고 균형을 잃은 내 이전의 감정선 들은 조금씩 내면에서 정리되어 가는 감정으로 그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2009년 4월 19일 주일 예배, 마침내 신앙의 은사를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베일이 벗겨졌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모든 것이 다방면에서 분명하게, 뚜렷하게, 깊게, 그리고 넓게, 새로워 보이면서도 친근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듯 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알았습니다. “예, 저는 그 일부가 되고자 합니다!”
결과적으로 제 삶의 무엇이 변했을까요? 단편적으로는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직장 이든, 나의 개인적인 환경이든, 새로운 형태의 고백은 매일의 삶을 금으로 된 실로 수놓는 듯합니다. 이제 저는 고통과 시험을 이해합니다. 내 영혼에 놓인 사역이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도로써 모든 것을 하나님 발 앞에 내려놓고, 목적의식을 가지고 신앙의 행보를 추구해나가며 분투하고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삶의 아름답고 풍부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나에게 허락해주신 은혜의 은사로 여깁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저의 변화에 대해 제 가족들이 반응한 방식 역시 이 시기의 저에겐 매우 진지한 문제였습니다. 저는 당시, 그리고 지금도 역시, 제 딸이 보인 반응은 특별한 은사였구나 생각합니다. 종종 제 변화에 웃음을 짓더라도, 제 딸은 제 신앙에서 발산하는 신실함, 그리고 경건함과 강건함을 자신의 마음으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의 딸도 나의 세례와 인침의 때인 2009년 6월 3일, 저와 함께해야겠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영어원문 참조 : http://nac.today/en/158039/479330 http://nac.today/en/158039/479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