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1월 국제 소식
예수님의 희생을 그토록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은 고통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며, 심지어 죄 없는 무결함도 아닙니다. 그 효력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수석 사도의 예배에서 발췌한 이 말씀은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순종이 우리를 의롭게 했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예수님의 희생에 효력을 주는 것입니까? 고통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고, 죄 없는 무결함도 아닙니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이 점을 명확히 합니다. 오랜 시간 기독교는 고통에 큰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고통 받으면 구원 받을 거야.”라고 설명하면서. 달리 말하면 고통이 없으면 천국에 갈 기회조차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가난한 이들, 불운한 이들에게 위로를 줄 때 무척 실용적입니다. 다른 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고통 받고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지만 곧 천국에 가게 될거에요.”라고 말하고 끝내버립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지닌 효력은 그분의 고통과 죽음에 연결된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구원으로 이끌어주지 않습니다. 내가 이점을 말한다고 해서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이전에도 지금도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것보다 더 큰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내 생각에 이것은 명확합니다.
물론 로마인들은 잔인했지만, 인간의 잔인함에 한계란 없습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지금 독일에서 내가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만 아주 쉽게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또한 오늘 날 세상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가장 큰 고통을 받으신 분은 아닙니다. 최악의 통증을 견뎌야 했던 분은 아닙니다.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진실로 사실이 아닙니다.
희생의 효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기반을 두지 않습니다. 어쩌면 “맞아, 그러나 예수님은 잘못이 없었어.예수님은 어떤 잘못도 없이 죽음을 당하셨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살해당한 어린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으며 암에 걸린 이는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이것 역시 끔직한 고통이지 않습니까? 오늘 날에도 무고한 사람들이 끔직한 방식으로 고통 받고 죽습니다. 물론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지닌 효력은 어디에 기반을 둘까요? 바로 그분의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수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단 하나의 죄도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늘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희생의 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완벽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자기 자신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느껴지시나요? 이는 아담과 이브와는 정반대입니다. 정확히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천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순종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