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초, 화려한 예복? 멘크호프 사도가 없었다면, 새 사도 교회의 예배는 어쩌면 오늘 날에도 이런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멘크호프 사도의 소천 125주년 헌정의 내용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2020년 7월)
수석사도라는 직무가 형성되기 전, 두 명이 구성하는 지도부가 있어 보였습니다. 프레드릭 빌헬름 슈왈츠와 프레드릭 빌헬름 멘크호프가 바로 그 인물입니다.(참고 역자 주 : 두 분은 형제가 아닙니다) 구불구불한 방향이 이 두 인물을 함께 이어주었습니다.
슈왈츠 사도는 함부르크 회중이 보편적 사도교회로부터 분리 독립하던 1863년의 사건 그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언이 슈왈츠 사도를 네덜란드의 새로운 사역 지역으로 이끌었습니다.
중대한 만남
바로 그곳에서 몇 해 앞서 독일 베스트팔렌을 떠나 정착해있던 개신교 목사 멘크호프와 함께 길을 건넜습니다. 순회 장인과 네덜란드에 이주한 계절노동자의 발자국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슈왈츠 사도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황무지에서 떡 값을 벌고 있던 가난한 독일인들에게는 더 큰 생명의 떡이 필요했습니다.”
그 다음은 역사였습니다. 멘크호프는 슈왈츠 사도를 통해 새 사도 신앙에 대해 들었고, 인침을 받았고, 복음자의 직분을 받았고, 주교로 안수를 받은 뒤 끝내 사도로써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둘은 이후 어느 날 새 사도 교회가 시작 되는 것을 함께 구체화했습니다.
교리와 예배 양식에 대한 유산
슈왈츠 사도는 실제로 보편적 사도 교회의 전통에 입각했으나, 멘크호프는 끝끝내 보다 정교함을 줄인 예배에 대해 슈왈츠 사도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알고 있는 방향점의 개선은 1870년대 네덜란드에서 시작했으나, 독일에서 수립되기까지는 20년이 더 지나야 했습니다.
멘크호프 사도는 교리에 다음의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 “빌레펠트 사도 회중의 신앙 원칙 및 고백”이라는 문건을 작성하였고, 이는 본 문건의 하위주제이기도 했던 “성만찬 기념 방식”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 세례에 관한 서신을 작성하였고 본 서신은 훗날 요한 고트프레드 비쵸프 수석사도 시기 때까지 성례전의 정의과 관련하여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시대의 책”이라는 서적을 번역하였습니다. 이 책은 슈왈츠 사도의 통제 아래 제작된 것으로, 로큰펠더 지역사도 및 베인만 지역사도 시기 때까지 새 사도 교회의 종말론 교리를 구성합니다.
인쇄물로 족적을 남기다.
교육 홍보의 한 가지 수단은 새 사도 교회 최초의 월간지 헤롤드에 출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멘크호프 사도는 1884년 이에 착수해 1895년 6월 21일 그의 죽음을 앞 둔 몇 달 전까지도 콘텐츠를 감독했습니다.
헤르만 니하우스 수석사도의 생일을 맞아 공개된 선물은 멘크호프 사도의 사후에도 그의 업적에 대한 존중과 의미심장함을 보였습니다. 이 출간물은 아름답게 디자인되었고, 특히, 사도, 예언자, 복음자, 목자라는 사 중 직분이라는 해당 출판물의 중점은 사도 멘크호프가 직접 작업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