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1월 국제 소식
16세기, 루터의 이론에 대한 논쟁이 종교개혁자들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로 모이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고성이 난무했지만 당사자들은 이후 수 년 동안 지속된 종파 간 평화를 이루게 해준 합의에 도달하게 됩니다. 진-룩 슈나이서 수석사도께서 바로 이 도시의 방문을 앞두고 계십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사람들에게 거룩함이 더해진 것처럼 보입니다. 매해 8월 8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평화의 축제가 열립니다. 출근하는 대신 시청 앞 광장에 모여 음식을 나누고 평화의 전당에서 이 날을 기념합니다.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이러한 전통이 몇 해에 걸쳐 기념되었지만, 그 기원은 16세기입니다.
1518년 10월 마틴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를 방문합니다.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교회 앞에 붙여, 면죄부를 포함해 당시 만연해 있던 종교적 견해와 관행에 대해 의문을 던진 후 좋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루터는 독일제국과 로마의 지축을 흔들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루터를 이교도로 고발하고 종교 재판을 진행합니다. 철회하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청문회에서 로마 대사인 토마스 카예탄 추기경의 심문을 받고, 주장하는 바를 철회하라고 강요받았습니다. 1518년 10월 12일-14일 신앙인들 간 다툼이 있었지만 합의 없이 종료됩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루터, 로마 추기경과의 고성 다툼
루터는 철회를 거부하고 3일 째 되는 날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카예탄은 그 뒤 고성을 지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저런 짐승과는 더 이상 말을 섞기 싫다. 움푹한 눈에 머리는 환상으로 차있구나.”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를 빠져나왔는데, 시장의 아들이 “여기 아래요!”라고 말하면서 그를 위해 시의 문을 열어 탈출을 도왔습니다.
이후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이 아우크스부르크에 나타납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는 “새로운” 신앙의 필수적인 뼈대를 포함했습니다. 25년 후에는 신앙 고백서를 따르는 이들이 결국 로마 가톨릭 교회의 동등한 발걸음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평화가 결론 나던 때입니다. 이 합의는 두 종교의 평화적 존치를 가능케 했습니다. 최소한 몇 년 동안은 말입니다.
이러한 평화의 시기에 대한 기록은 여전히 도시 가벽에 새겨져 있습니다. 몇 세기가 지난 지금, 개신교와 가톨릭 두 교회가 서로 가까이 지어졌고 여전히 두 종파 간 평화의 공존에 대한 건축학적 증거를 보여줍니다. 상당수의 부유한 가톨릭의 푸거 가문은 개신교 교회인 산타안나에 묘지를 두었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가장 큰 새 사도 교회 회중은 이러한 특별한 장소로부터 몇 킬로미터 떨어진 거주 지역에 위치해있는데, 이곳은 역사적인 빌라를 한 곳에 두고 다른 한 편으로는 현대 아파트 건물이 들어선 곳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오로지 두 교회만 공식 예배를 허락했었던 바이에른
바이에른 지역의 2021년 새 사도 교회는 특별한 기념일을 챙깁니다. 125년 전 바이에른 지역과 아우크스부르크에 새 사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튀링겐에서 온 테오도를 아커맨과 발렌틴 슈미츠 두 남성은 새 사도 회중을 세우기 위해 자유의 주로 여정을 떠났습니다. 당시만 해도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 두 곳에서만 공식 예배를 허락받았던 점을 고려해보면 쉬운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아커맨은 아우크스부르크에, 슈미츠는 뮌헨에 정착합니다. 신앙이 퍼지기 시작한 곳은 바로 이 두 도시였습니다. 우선 교회를 커피 가게로 위장하고 관심이 있는 이들만을 초청했습니다. 초기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896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새 사도 교인들이 인침을 최초로 받게 됩니다.
몇 해가 지난 뒤 새 사도 교회의 공식 예배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신실한 여성 덕분이었습니다. 여러 선회 이후 발렌틴 슈미츠의 아내인 아나스타샤 슈미츠는 루이트폴드 왕자에게 탄원을 했고, 이후 1906년 7월 새 사도 교인들의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허락했습니다. 바로 이때부터 아우크스부르크 구성원의 숫자가 빠르게 늘었습니다. 1949년 800명의 구성원이 생겨납니다. 교회 지도부에서는 회중을 위한 건물 건축을 결정했습니다. 구성원이 스텐튼스트라브 교회라고 부르는 이곳이 바로 이렇게 생겨났습니다.
넓은 디자인을 보면 900여명의 구성원을 위한 넓은 공간을 제공하며 현재는 450여명의 구성원으로 바이에른 주에서 가장 큰 회중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지역의 특별하고 “큰” 예배가 여기서 열립니다. 그러나 10월 1일 수석 사도 직분을 위해 연초부터 준비를 시작한 건 이 회중만이 아닙니다. “수석 사도 직분의 우리 회중 방문 예정이 발표된 이후 모든 바이에른 지역의 회중들이 시작부터 함께 하고 있다,”라고 회중 담당 렉터 피터 올프는 전해왔습니다.
구성원들이 이 날을 기다렸습니다. 지역 공동체 간 카풀이 만들어지고, 성가와 오케스트라가 매주 연습으로 분주합니다. 음악가들은 이러한 큰 규모의 연주가 변화의 기회가 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한 지역의 홈페이지에서는 디지털 시계로 일, 시간, 분, 초의 카운트다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축제
그러나 우리는 다시 아우크스부르크도 돌아와 잠시 동안 종교 역사의 기념비적인 사건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시청에서는 1629년 시작된 이 사건을 8월 8일 기념합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1555년부터 화합에 이르긴 했지만, 이 평화는 중대한 분열을 맞았습니다. 그 해 여름 모든 개신교 설교자들이 파면되고 교회가 문을 닫았습니다. 페르디난드 2세 황제가 파멸을 불고 왔던 것입니다. 이후 개신교 신도들은 약 4년 동안 야외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들은 현재까지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이 날을 기념합니다.
또한 평화 축제는 더 이상 가톨릭과 개신교도들만을 위한 행사는 아닙니다. 수년에 걸쳐 이 행사는 전 세계 종교인들이 시민들에게 인사말을 건내고, 시민들 역시 난민과 다른 국가 사람들에게 평화의 전당에서 음식을 나누곤 합니다. 3년 마다 한 번, 아우크스부르크 시에서는 중재와 상호 이해를 위해 사역한 이들에게 평화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