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국제교회 소식
처음에 해리 프란켈(Harry Fränkel)은 남아프리카에서 피난처를 찾았다가 다시 미국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는 벨기에와 프랑스를 거치며 그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세계가 오늘날 1월 27일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의 날을 맞이하고 있는 가운데 해리 프란켈을 추모하며 경의를 표합니다.
1939년 1월 11일의 독일 에이펠 지역은 온화한 겨울날이었습니다. 독일에서 벨기에까지 30km를 걷기에는 이상적인 조건이었습니다. 해리 프란켈은 박해와 체포를 피해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유태인 출신 남성이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심문을 받을 때 한 이야기입니다.
해리 프란켈을 심문하는 사람들은 또한 그가 소득이 있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네, 해리 프란켈은 룩셈부르크 출신의 목사 루시엔 부케로부터 매달 400프랑을 받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부케는 에슈쉬르알제트 새사도교회의 목사입니다. 언뜻보기에 프란켈은 그를 통해 스위스의 새사도교구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신부, 실업가
해리 프란켈은 1882년 4월 27일 독일 북부 브레멘 근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인 살로몬과 엘리제 프란켈은 유대인이었습니다. 1908년 7월 23일 그는 개종하여 새사도교회 회중이 되었습니다. 1909년에 그는 이미 도르트문트의 주일학교 교사였습니다. 1911년 그는 부집사로 안수 받았고, 1922년경에는 사제로 안수 받았습니다.
해리 프란켈은 성공한 직물 상인이었습니다. 그는 세 아이를 대학에 보낼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은 가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33년, 나치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한 해가 밝았습니다.
핍박
두 부모가 모두 유대인으로 소위 완전한 유대인이었던 프란켈은 메이어 & 귄터 회사의 상무이사직을 잃었습니다. 그는 자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어 잡지 Unsere Familie(우리 가족들)의 광고에는 이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938년의 법은 그가 사업을 운영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그의 아들 에리히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들 역시 그 사업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한편 프란켈 사제는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목회 활동을 중단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다시 인쇄된 성가대 폴더에는 찬송가 작가로서의 그의 이름이 누락되었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그의 아들 해리 주니어는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을 거절당했습니다. 그에게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프란켈 시니어가 이민을 결심한 때입니다.
도주
첫 번째 시도는 그 자신을 남아프리카로 데려가는 것이었습니다. 해리 프란켈은 수석 사도 대리인 하인리히 프란츠 슐라포프에게 편지를 썼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법령에 따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유럽계 유대인들에게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에게 아르헨티나에 있는 연결할 수 있는 분의 주소를 알려 주었습니다.
벨기에는 그 당시 자유세계로 가는 관문이었습니다. 그 나라는 유럽의 이웃 국가들보다 난민 면에서 더 자유로웠습니다. 17개월 동안, 해리 프란켈은 벨기에 브뤼셀의 다른 다섯 개 지역에서 가족과 친구, 회중들과 떨어져 살았습니다. 그가 브뤼셀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을 받기 위해 싸우는 동안, 나치스 정권하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는 그의 행방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했습니다.
추방 및 구금
그날 벨기에에서는 1만여 명이 체포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갑자기 적대적 외국인으로 낙인이 찍혀 국가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대량으로 추방되어 철도를 타고 프랑스에 이송되었습니다. 과열되고 과밀해진 열차에는 마실 것이 거의 없었고, 앉거나 누울 수도 없었으며, 화장실도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해리 프란켈은 프랑스-스페인 국경에 가까워졌습니다. 먼저, 그는 생시프리앙 수용소, 1블록, 42번 Barack No I, 그리고 나서 프랑스에서 가장 끔찍한 강제 수용소로 여겨지는 귀르스(Gurs)라고 불리는 곳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배고픔, 추위, 해충, 질병, 그리고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1940년 6월 22일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날이 다가왔습니다.
지옥에서
휴전에 이어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해리 프란켈은 마지막 여정을 떠났습니다. 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재판 전 구금과 도르트문트에 있는 악명 높은 슈타인바체 감옥(그의 집과 가족으로부터 약 2km 떨어진)을 거쳐 베를린 근처의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로, 마지막으로 아우슈비츠로 끌려갔습니다.
1942년 11월 5일 오전 8시, 그의 생명은 이 지옥에서 끝났습니다.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센터인 야드 바셈(Yad Vashem)은 “살해”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해리 프란켈의 이름은 새사도교회 찬송가 “당신이 서 있는 곳이 거룩하니 신발을 벗어라”의 저자로써 계속 남아 있습니다.
해리 프란켈의 운명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역사학자 칼 피터 크라우스의 저서 《NS-Zeit》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의 10.3장은 귄터 퇴르너 교수의 초기 작업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