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함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무게를 잽니다. “내가 얼마나 넣어야 할까? 이렇게 함으로써 난 무엇을 얻게 될까?” 그리곤,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의 계산이 정확한가?
“du ut des” (내가 주었으니, 너도 주어라)라는 고대 로마의 표현은 오늘 날에도 매우 널리 퍼져있습니다. 가치 있는 보상이 있다면, 투자할 것이라는, 내가 무언가를, 혹은 더 큰 어떤 것을, 즉 분명한 이익이 대가가 될 때에만 기쁨으로 무언가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헌금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내가 하나님을 대할 때, 얼마나 약삭빨라야 할까요?
10월의 예배 말씀들은 “우리의 헌금”에 관해 다룹니다. 한 해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는 교회력을 따르며,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함과 사랑에 대해, 더불어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우리의 섬김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한 번 더 있습니다. “우리의 헌금,” 이것은 금전적 헌물과, 동시에, 베풀고 함께 나누려는 비물질적 노력으로 구성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맞이하신 죽음이라는 희생에 절대 필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의 비율, 우리의 모습 100퍼센트!
헌금함 옆에 계산기가 없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헌금의 횟수나 양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자산, 혹은 순이익에 기반을 두었는가, 아닌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딱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우러나와 베풀고 희생하겠다는 내면의 동력과 의지입니다. 이러한 규칙은, 어떠한 비용-이익 계산법을 다 떠나고, 어떠한 형식을 취하는지도 중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복 주심은 자동적이지 않습니다. 돈으로 살 수도 없으며, 강제될 수도 없습니다! 재정적 성공, 육체적 건강, 수많은 친구들 모두 구원의 거룩한 은사로 여길 수 없습니다. 돈으로 벌어들이거나, 구매할 수 있는 상품과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보호하심이라는 거룩한 모습에서 스스로 정체를 드러냅니다. 거룩한 복은, 성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더 가까이 오시고, 그분께서 직접 유대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헌신하시는 성례전 의식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십자가에서의 희생, 강건함과 의지가 뒤 따르며, 이 모든 것들은 구원을 가능케 하고, 단지 시간만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결과, 바로 우리의 초점이 되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로써 우리에게 이익이 됩니다.
헌금은 활발해짐을 의미한다!
헌금과 희생에 대한 의지는, 믿는 이들의 입장에 있어, 하나님에 대한 감사함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토큰입니다. 육과 영의 생명의 기원이 어디 인지, 어느 곳으로 인도하고 있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나타내 보여줍니다. 창조의 권능이신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으로 향하는 우리의 길을, 만약 인간의 존재로써 가능하다면, 포장하려는 과정입니다. 믿는 이들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헌신하겠다고 선택한 지식의 근저가 바로 이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복음에 입각해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2:7) 경청과 다가감, 공감함, 회중 내에서 개인의 특정한 능력을 사용함으로 우리의 이웃을 섬기는 것도 희생입니다. 당연히 교회가 사역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우리의 재정적 헌금도 바로 이러한 희생의 한 부분입니다.
관중의 역할에서 참가자의 역할로 변화하는 것, 즉, 자신의 은사와 재능을 십분 활용하겠다는 결정은 때로 어려운 것이며, 종종 우리를 위안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러한 결정은 희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과 자기 자신의 능력에서 비롯되는 하나하나의 것들을 구성합니다. 그러나 부디 우리는 비교하지 맙시다. “다른 사람은 나보다 적게 일하니, 나도 적게 일할 것이다.” 혹은 “저 사람은 엄청 열심히 일하네, 관심 받고 싶어하나보다.”와 같은 생각들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겠다는 내면의 기폭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생각들입니다.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우리의 헌금과 희생의 기반은 십자가 예수님의 헌신입니다. 그분께서 유일무이하고 비교할 수 없는 희생을 감내하신 것은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헌금과 희생은 오늘 날에도 계속해서 이와 같은 태도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때때로는 모종의 고통을 수반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헌금은 결국,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적인 부를 (금전 혹은 생산물의 형태로) 주는 것과 우리의 영적인 부요를 (거룩한 구원에 대한 숙지) 주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의 의무입니다. 이는 그것을 바친 이들이 올바른 관점으로 사안을 바라보게 해줍니다. 이제 이것은 더 이상 이익의 극대화에 관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우리 이웃의 슬픔과 어려움은 더 이상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욕심과 탐욕은 죄입니다. 이 둘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위반하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헌금과 희생은 이 계명을 깨지 못하도록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그분을 우리를 위해서,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33) 여기서 ‘먼저’라는 말은 ‘배타적으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눈가리개를 끼고 생각하라는 것을 요구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자신의 가정, 직업, 공동체, 건강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하나님의 왕국에 초점을 둘 때,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다르게 설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우선순위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설정된다면, 물질적인 것들의 안정도 중요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걸으신 길입니다. 사랑의, 희생의, 인내의, 화해의 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것은 그분께서 하신대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조 : 영어 원문 기사 : http://nac.today/en/158033/5146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