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C Korea

새사도교회 한국

  • 이달의 실천말씀
  • 새로운 소식
  • 새 사도 교회는
    • 환영합니다
    • 새 사도 교회는?
    • 자화상
    • 전망과 목표
    • 새사도교회의 역사
  • 거룩한 예배
    • 대 예배
    • 세가지 성례전
  • 사도 직분이란?
  • 새사도 교회의 교리
  • 신앙신조
  • 우리와 연결하기
  • 직분의 구조, 임무
  • 한국 지역별 교회
  • 헌신, 재정, 중립
  • 직분의 개념 시리즈(완)
  • 목자적 보살핌 시리즈(준비중)
  • 성례전 시리즈(준비중)

스스로 증언하는 진리

2025년 12월 21일 by nac korea media team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진리가 있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진리는 인격체(Person)라고 말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의 질문은 마치 소셜 미디어의 뜨거운 댓글란에서 곧바로 나온 듯합니다. “이것이 나의 진리입니다”,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 “사실 확인(fact checking)”. 모두가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이 보통 의미하는 것은 의견, 기분 또는 다수결입니다. 빌라도의 질문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입니다. 단지, 그는 그 답이 바로 눈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진리가 육신을 입고 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진리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진리로서의 예수님은 단순히 종교적인 사실이 아니라, 이 진리는 분류되거나 하나의 논리적 사고 안에 억지로 끼워 맞출 수 없기에, 오히려 우리에게 피할수 없는 강력한 실체(압박, imposition)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긴장감입니다. 기독교에서 진리는 추상적인 개념도, 완벽한 정의도 아니며, 인격체입니다. 단순히 그것이 옳다고 여길 수 없으며 반드시 마주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해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내가 곧 진리다”였습니다. 그분을 만나는 이들은 예수님은 주로 말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Truth as a relationship

관계로서의 진리

예수님이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소개하실 때, 철학적 에세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논쟁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십니다. 신실하시고, 믿을 수 있으며, 투명하십니다. 이 진리는 단순히 올바른 진술에 서명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 진리가 여러분을 찾아오도록 허용할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모든 게임을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주장으로 논쟁하지 않으십니다. 교활한 질문(황제에게 바치는 세금, 간음한 여인, 안식일)에 직면했을 때, 예수님은 관점을 뒤집고, 되묻고,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논쟁에서 이길 것인가?’라는 게임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분은 토론 모임이 아니라, 계시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끝없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단순히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 헌신하는 사람들은 이 진리가 그들의 세계관에 추가되는 요소가 아니라, 죄와 실패, 질병과 두려움, 죄책감과 자기기만을 헤쳐나가도록 지탱해주는 기초임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권위 있는 진리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이 지적인 말씀 그 이상이 있음을을 느꼈습니다. 복음서에서는 “그분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단순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용서를 말씀하셨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유를 선포하셨고, 사람들을 그들의 속박에서 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말씀하셨고, 병든 자를 일으키시고, 소외된 자를 도우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곧 진리이시며, 이 진리는 그 효과를 통해서 단순히 스스로 증언합니다. 이 진리의 증명은 연역적 추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이야기로서 발견됩니다. 그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능력을 경험했고, 그것을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눈이 멀었었는데, 이제 본다.” “그는 잃었다가 찾았다.” 예수님은 자신의 논제를 옹호하기 위해 파워포인트 발표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증거는 바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삶이 변화된 사람들이 바로 그 증거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서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확신시킬 뿐만 아니라, 감동시켜야 합니다.

사랑의 손에 들린 거울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진리는 불편하면서도 해방감을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견 속에서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에게 비춰 드는 거울처럼, 우리 마음속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게 할까요? 가면(“나는 무언가를 대표해야 한다”는 생각), 종교적 행위 압박(“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틀릴까 봐 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기독교적 진리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무기가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 자신, 우리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러나 이 거울은 사랑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자”고 말합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가혹할 것입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자의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사랑과 진리가 모두 하나가 됩니다. 그분은 폭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유하기 위해 죄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막으신 후에야,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자유가 태어나는 방식입니다. 즉, 우리의 실수가 사소하게 여겨져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운 눈 아래에서 그 실수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통해 말하는 진리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셨을 때, 그들을 이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한 중재자로 삼지 않으시고,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증인이 되리라.” 증인들은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언가를 경험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모든 토론에서 이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가 우리를 어떻게 지탱하고, 위로하며, 변화시키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진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신뢰할 수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모든 토론에서 이기지는 않지만, 종종 용서를 실천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큰 소리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조용하고 끈기 있게 진리에 의해 인도되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의견이 가득한 세상에서, 믿음은 진리를 정의하는 것보다, 진리에 의해 우리가 형성되도록 허용하는 것과 더 관련이 있습니다. 빌라도의 질문은 복음서에서 답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정의를 제공하지 않으셨지만, 법정에서 골고다까지, 그리고 그곳에서 빈 무덤까지 진리를 더 추구하셨습니다. 진리는 소리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확신에 차 있어서 심지어 침묵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는 논쟁 속에서 설명되지 않고, 여정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이 여정을 시작하는 사람은 가장 중요한 대답은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깨닫게 됨을 발견할 것입니다.

Photo : AI generated

2025.11.20.
Author: Simon Heiniger

The truth that attests to itself

Filed Under: 새로운 소식

© Copyright 2012 New Apostolic Church Korea. All Right Reser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