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은 비단 달력에만 적힌 날이 아닙니다. 부활절은 많은 단계로 이루어진 길의 정점이자 마지막 종착지입니다. 그 시작점이 바로 오늘입니다. (2017년 부활절은 4월 16일입니다.: 역자 주)
부활절에 있어 특별한 점은 북반구 지역의 봄의 시작이라는 점이나, 달걀과 리본으로 장식된 부활절 나무 장식과 같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들은 최소한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부활절을 구성하는 요소이긴 합니다. 부활절,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합니다. 매우 특별한 행사입니다. 이러한 기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언제나 부활절이라는 축제를 이끌어내는 준비의 나날들이 있습니다. 종려주일, 성금요일, 부활절. 이러한 날들의 기간은 고난 주간이라 불립니다.
금식은 우리의 책임감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부활절 이전에, 금식과 기도의 기간이 있습니다. 고난주간의 시작은, 서양교회의 교회 달력에 따라, 재의 수요일(사순절의 첫날)입니다. 사순절, 라틴어로 40이라는 뜻이며, 40일 간의 회개의 시간 끝에 부활절이 있습니다. 실재로는 부활절까지 46일이 있으나, 6개의 일요일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순절의 기독교인들이라 불리는 이 40일의 금식 기간은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가셔서 금욕의 생활을 하셨던 모습을 따른 것입니다. 재의 겉모습은 회개를 뜻하는 표시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베로 만든 옷과 재를 뒤집어쓴 채로 속죄하고 성찰의 시간을 시작합니다.
금식의 기간은 다른 주요 종교에서도 잘 알려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의 경우 라마단이라는 금식의 기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맥락상 금식은 엄격한 규율을 따르거나 영적인 단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속적임 책임감의 확인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의 환경에 대해,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 책임감을 지닙니다. 인간의 존재는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도 책임감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시대를 관통하여 적용됩니다. 그러나 금식의 기간은 이러한 책임감을 다시금 상기시켜줍니다. 원칙적으로 금식은 적게 먹거나, 식사를 하지 않거나, 먹을 것을 자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성찰하고 중재하는 것이 금식의 관념입니다.
의기양양, 박해의 길을 열다.
이는 인류가 언제나 실패하는 일입니다. 부활절 전 일요일, 종려주일이 바로 그 예시입니다. 종려주일은 성스러운 주간의 시작점입니다. 바로 주님의 고통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종려 나뭇가지를 땅에 놓고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하루하루가 행복, 열정, 희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군중은 로마의 멍에로부터 자신들을 구해내 주실 이스라엘의 구원자께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 결과가 이와 정반대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의기양양함은 곧 박해의 길을 열었습니다. 악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세족 목요일, 빚을 갚는 날.
성금요일 전 목요일인, 세족 목요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제자와 함께 유월절을 기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체포가 임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난폭한 괴롭힘을 받으시고, 박해 받으시고, 매 맞으시고, 죽음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유월절을 기념하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제자들에게 피력하시며 말씀을 이으셨습니다. 바로 존중과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통치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서로가 서로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대 전통에 따르면, 세족 목요일은 씨앗이 뿌려지는 날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세족 목요일은 언제나 이자와 빚을 갚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성 금요일의 고요함
성금요일은 고통의 시간이 끝나고 찾아옵니다. 애통함이 일어나고 궁극의 슬픔이 고조에 달합니다. 모든 화려함이 잊혀 집니다. 만물이 정적을 이루고, 모두가 묵상에 잠깁니다. 모두가 부활의 날, 부활절을 기다립니다.
<영어원문 참조 : http://nac.today/en/158033/463711 http://nac.today/en/158033/463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