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소식
누가 옳은가? 종종 듣는 질문입니다. 법은 누구의 편인가? 이는 이미 답하기 무척 어려운 질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법을 가까이 두는 일은 실제 옳은 것과 꼭 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정의란 무엇일까요?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날까요? 이 주제에 대한 몇 가지 말씀입니다.
몇 구절의 역사를 뒤돌아봅시다. 80여 년 전 유럽에서 터진 사건은 비인간적이었습니다. 국가, 사상, 문화가 처참히 무너졌습니다. 무기는 죽음의 언어를 말했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많은 가해자가 있었습니다. 수 백 만의 군인이 전사했습니다. 독일의 나치 정당은 수 백 만의 유대인을 학살했습니다. 전멸, 분열, 완전한 야만성의 시기였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의 존재가 다른 인간에게 이토록 큰 고통을 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75년 전, 전쟁에서 승리한 동맹군은 마침내 “심판의 날”을 위해 단에 섰습니다. 1945년 11월 20일부터 1946년 10월 1일까지 국가 사회주의 정당의 핵심 구성원들은 600개의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군사재판을 받으며 행위에 대한 답을 심문 받았습니다. 총 24명의 나치 전범이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의 동맹군으로 구성된 국제 군사 재판에 섰습니다. 핵심 범죄에 대한 심문으로 12건의 사형, 3건의 무기 징역, 4건의 장기 복역, 3건의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유사한 성격의 범죄 심문이 미국 군사재판소에서 그 뒤를 이었습니다. 총 185명의 피고인이 법정에 앉았습니다. 최종 선고는 1949년 4월 14일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법이란 무엇인가?
살인자에게 주는 벌로 사형 집행은 적합한 수단일까요? 이로써 희생자에게 보상 혹은 적합한 배상이 될까요? 이와 같은 질문은 인간의 정의가 언제나 일시적이며 결함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존재로써 가진 불완전함입니다. 실수 역시 인간의 존재를 이루는 구성 요소이기 때문에 완벽하고 완전한 판결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민주 사회에서는 전범과 인간성에 대한 범죄를 처벌했다는 점과 국제 법정, 용기 있는 판사, 검사, 법을 위해 선 변호사들의 존재에 감사해합니다.
정의란 무엇일까?
오늘 날까지도 무엇이 진실로 정의로운 것인지 대해서는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쩌면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분명한 답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정의로움의 완전한 형태는 하나뿐이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기독교인들은 실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보다도 인간의 정의와 성스러운 정의의 차이점에 대해 자주, 또 분명하게 언급하는 성경도 없을 것입니다. 평가, 법, 규칙의 체계를 공정하게 만들길 원하는 이들이라면 이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인간의 존재는 언제나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새 사도 교리서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입각해, 법과 정의라는 질문을 더 높은, 성스러운 수준으로 옮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처벌 대신 은혜를 허락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보복을 원치 않으십니다. 위협을 가하는 경고 대신,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중재를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경멸을 당하시고, 비난을 당하는 일을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위해 본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베드로전서 2장 21-24절)
하나님께서 의로우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다른 원칙에 입각해 이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죄에 빠진 인류 역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행위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때로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큰 문제를 겪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의로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올바름을 두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검사 혹은 변호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두의 역할을 행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위배할 때, 죄를 범한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것입니다. 범죄함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의로우심과 전지하심으로 죄를 범한 사람의 잘못된 행위를 다루실 때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범죄함의 크기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측정할 수 있습니다.” (새 사도 교회 교리서 4.3.2.) 더 나아가 “특정한 죄로 인해 벌어진 범죄함은 ‘하나님께 울부짖는’(창세기 4장 10절) 정도의 심각함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사실 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법은 어떻습니까? 중요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성스러운 표준을 향하지 않는 다면 그렇습니다! 새 사도 교리서에서는 이에 대해서도 분명한 지침을 세웁니다. “교회는 또한 회중들이 국가의 의무와 법률들이 거룩한 계명과 조화를 이루는 한, 그것을 준수하기를 기대합니다.(새사도교리서 13.5.1)”
기독교인은 원칙적으로 국가의 권위에 종속되지만 “국가의 권위는 거룩한 율법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지상의 법과 거룩한 율법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충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 개인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는 규정에 따를 것인지, 규정에 저항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해야합니다.“
생각해 볼 그 무엇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뉘른베르크 재판, 명령을 내린 모든 사람들, 명령을 따랐던 모든 사람들에게 유사한 죄책감이 가득 찬 테두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세계사에서 이 수치스러운 시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바라보면, 모든 인간이 언젠가는 거룩한 정의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불완전함에 용감하게 맞서고, 주님의 은혜에 거리낌 없이 항복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되도록 죄에 굴복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