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도, 가스레인지도 없는 고향은 없습니다.” 아부가 말했습니다. 아부는 난민이며 자신의 고향, 문화, 가족과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전 세계적으로 매일 일어납니다. 아부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아부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세계 난민의 날은 매년 6월 20일 기념됩니다. 오늘날 난민들은 “이민자”라는 단어로 언급됩니다. 이 용어는 작은 차이를 만듭니다. 이민이든 난민이든, 그들은 환경으로 인해 자신의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 구조 받을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수 천 수 백 만이 강제로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2000년 12월. 국제연합(UN) 총회는 6월 20일을 세계 난민의 날로 공언했습니다. 이듬해부터 기념되기 시작했습니다.
글로벌트렌드라는 이름으로 나온 국제난민기구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650만 명이상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야만 했으며, 그 어느 때 보다 가장 높은 수를 보였습니다. 이 중 반절 가량이 어린 아이들입니다. 시리아, 남수단, 이라크의 전쟁, 나이지리아와 예멘의 기근과 분쟁으로, 사람들을 고향에서 내모는 재앙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다수는 가난한 국가로 이주합니다. 부유한 국가들은 소수의 난민만 받습니다. 난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습니다. 반면 아프리카 내 난민캠프의 규모는 계속해서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텐트와 판잣집이 우후죽순 널브러진 도시의 형상을 띄며, 50제곱킬로미터의 크기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쫓겨나는 것의 악몽
아부는 “고향을 잃는 다는 것은 악몽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부는 자신에게 익숙했던,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아부는 스스로를 위해 쌓았던 것들을 알 수 없는 미지의 것과 교환했습니다. 서로 다른 이 두 공간은 양극이었으며, 두 공간 사이의 거리는 매우 멀고, 지치고, 위험했습니다. 난민들이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생명뿐입니다.” 아부가 간곡히 말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둥지를 떠난 새의 형상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향을 잃고 떠도는 사람은, 둥지를 잃고 떠도는 새와 같다” (잠언 27:8)
난민을 돕는 일 – 기독교인의 의무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독교인의 계명은 난민을 돕는 일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말없이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난민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부모님께서 이집트로 떠나야했던 때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애 동안 핍박 받으셨고, 상처 받으셨고, 거부당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인들도 그랬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말은 복음이라는 계획을 위해 박해를 받고, 동시에 자신을 핍박하는 이들을 향해 굳건히 서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를 실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폭력을 그만두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폭력이나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며, 이 방법만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방법입니다.
친구들, 낯선 이들, 원수들. 그들 모두가 우리의 이웃입니다. 진-룩 슈나이더 사도장께서 예배 때 자주 언급하시는 점입니다. 사도장께서는 기도와 경청이라는 감정적 수준과 더불어 두 손으로 직접 개개인을 돕는 수준을 모두 말씀 하십니다. 연대책임의 본이 각 지역 교구들을 통해 세워지고 있습니다.
난민이 많습니다. 너무 많습니다.
난민에 관한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난민은 “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자신의 국적 국 밖에 있는 자로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번역 출처, 국제연합 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난민들이 현재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영어원문 : http://nac.today/en/Gesellschaft/486358 http://nac.today/en/Gesellschaft/4863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