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국제 소식
사람들이 그들이 들은 설교를 실천하지 않을 때 그것은 끔찍합니다! 우리는 손가락질 하는 것은 너무 빠르지만 거울을 보는 것은 완전히 잊어버립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람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하지만 또한 행동으로 보여줍니까?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또한 여러분이 설교하는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따르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충고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위선자들입니다. 성경 시대부터 그들은 바리새인들이라고 불렸습니다.
바리새인들과의 예수님의 대결은 유명합니다. 우리는 강한 단어들, 판단의 순간들, 인상적인 요구들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복음 23:3-5)
거룩한 말을 한다고 거룩한 길을 간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리새인들은 실제로 고대 유대교 내에서 신뢰할 수 있는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믿고 유대인의 종교적 규칙을 따르는 것은 경건함으로 규정되는 일상생활의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분리된’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파리시(pārûšh)(히브리어: פרשׂ)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분리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이해는 다음을 의미했습니다. 한 곳에서는 유대인들이 있고 다른 곳에서는 외국인들이 있고 여기에는 경건한 사람이 있고, 저기에는 이방인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또한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었고 특히 엄격한 정치-종교적 목표 때문에 중산층들(부르주아)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고대 역사에서 그들의 주요 업적은 구전 토라 또는 구전 율법으로 간주됩니다. 즉, 성전 예배를 경건한 유대인의 일상적 활동으로 이전한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나쁜 접근 방식이 아니었지만 구두 전달에서 자주 발생하는 것처럼 개인적인 견해가 교회법에 빠져들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의 엄격한 요구들을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기대와 현실의 괴리가 컸습니다. 그들의 전파 활동은 곧 “너희가 듣지 않으면 하나님이 너희를 벌하실 것이다”라는 위협으로 바뀌었습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진노의 하니님의 이미지는 수세기 동안 살아남았고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양이 우물에 빠졌을 때
본질적으로 이것은 예수께서 강력하게 비판하시는 과장된 표현으로 이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그분의 유명한 대답이 있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상황에 관계없이 적용되는 강경한 법은 상처를 줍니다. 양이 우물에 빠진다면? 안식일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곳에서 물에 빠져 죽게 놔두겠습니까?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계속 묵상하고 그분의 율법을 기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법을 지키라고 하는 어떤 말을 하든지, 법을 지키고 행동하여라. 법을 준수하는 것을 옳다. 그러나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이름만 기독교인
야고보서에는 성전에 예배하러 온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금반지를 끼고 좋은 옷을 입은 부자가 여러분의 모임에 오고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온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옷을 잘 차려 입은 사람에게 더 많은 존경을 표하고, 그에게 ‘여기 가장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라고 말하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저기 서 있든지, 내 발 옆에 여기 바닥에 앉든지 하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들 사이에 차별을 만들고 악한 동기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야고보서 2장, 복음성경(Good News Bible)).
물론 이것은 흑백 사고이지만 확실히 대조를 이끌어냅니다! 하나님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서도 차별을 합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이 꺼려하지 않는 것만 받으려 한다면 받기만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성경의 예에 따라 가장 마지막 줄의 자리일 가능성이 큽니다.
일주일 24시간 그리스도인 되기
그러므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고대 바리새인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많은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자주 훌륭한 말을 하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이 부족하다고 비난을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이 비난은 설교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진짜 질문은 “나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가, 아니면 실천하는가?”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찌 사랑하겠습니까?” (요한1서 4:20)
기독교 신앙은 그저 휘장이나 단순한 격식이 아닙니다. 진실하고 참된 믿음은 행동을 통해 나타납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태복음 25:40).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교회에 간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차고에 간다고 해서 자동차가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자동차는 차고가 아니라 도로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요일뿐 아니라 월요일에도 그리스도인입니다! 누구나 종교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그 구절을 매일 실천하는 것은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라벨에 그리스도라고 적혀 있다면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대사(大使)가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