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소식
자신이 설파한 것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끔찍합니다! 우리는 재빨리 손가락질을 하겠지만, 거울을 바라보기를 전적으로 잊어버립니다. 사람은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에만 진실해집니다.
많은 이들이 떠들고 또 떠들지만, 행동으로 보여줍니까?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자신이 설파한 것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조언하기를 좋아하면서 스스로는 그 조언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위선자들입니다. 성경의 시대에서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대면은 전설적입니다. 강력한 말씀, 계산의 순간, 두드러진 요구를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복음 23:3-4)
거룩한 대화가 거룩한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은 고대 유대 사회 내에서 공신력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모세의 율법을 믿고, 유대의 종교적 규칙에 순종하는 것이 독실함으로 규정되는 매일의 삶에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구별”되었다고 불렀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의 히브리 어원은 pārûšh (פרשׂ : 구분하다)입니다.
물론 이러한 구별이 함축하는 바가 있습니다. 유대인이 하나의 공간을, 외국인은 다른 공간을. 헌신 하는 이들이 여기에, 이방인들이 저곳에. 이들은 정치적으로도 활발하고 퍽 유명세를 띄었는데, 특히 이들의 엄격한 정치-종교적 목적에 매료된 중산 계급 사이에서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고대 역사에서 이들이 이룬 주된 성취는 구전 율법, 다른 말로 성전에서의 경배를 경건한 유대인의 매일의 활동으로 변모시킨 것입니다.
초기에는 잘못된 접근이 아니었지만, 구전으로 전달하다보니, 개인의 관점이 경전 말씀에 스며드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일반인들은 바리새인들의 엄중한 요구를 충족할 수 없었습니다. 기대와 현실의 괴리가 커져만 갔습니다. 이들의 설교는 곧 위협이 되기에 이릅니다. “듣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처벌하실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노여움이라는 형상은 수 세기 동안 이어졌고,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안에 뿌리 박혀 있었습니다.
양이 우물에 빠지면
근본적으로 왜곡에 빠졌고, 예수님께서는 그 점을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유명한 예수님의 답변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환경을 고려치 않고 적용하는 콧대 높은 율법이 상처를 입힌 다는 것입니다. 양이 우물에 빠지면 어떻게 할까요? 안식일이기 때문에 그대로 빠져 죽게 둘 것 입니까?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끝없는 성찰과 그분의 율법을 기뻐하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율법을 지키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키는 것은 아니어야 합니다!
말로만 기독교인
야고보서에는 부유하고 명성이 자자한 이가 성전에서 기도를 드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내 발 앞에 앉든지 하오” 하고 말하면, 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야고보서 2장)
물론 이러한 생각은 흑백논리이지만, 극명한 대조를 보여줌에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는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차별이 없어야 하는 곳에서조차도 차별을 일삼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의 사랑에 대하여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시기하지 않음으로써 받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받을 까요? 어쩌면 성경의 예시처럼, 맨 마지막 줄의 자리일 것입니다.
시종일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다는 사실은, 따라서, 고대 바리새인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많은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훌륭한 말과 그에 맞는 행동이 결여되어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자주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이러한 비난은 설교자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진정한 질문은 다음의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말로만 하고, 실천은 하지 않고 있는 것 아닌가?” 이 질문은 다음의 성경 구절이 뒷받침됩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요한1서 4장 20절)
기독교 신앙은 뱃지 혹은 단순한 요식행위가 아닙니다. 신실하고 진정한 신앙은 행동으로 증명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40절) 기독교인은 기독교인다운 삶을 살기에 기독교인이지, 기독교인이라 불린다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차고에 간다고 자동차가 되는 것이 아니듯, 교회에 간다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알버드 슈바이처가 한 말입니다. 자동차는 차고가 아니라 도로에서 완성됩니다. 기독교인은 일요일만 기독교인이 아니라, 월요일에도 기독교인입니다! 찬송을 부를 뿐만 아니라, 가사를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표를 지녔으니, 내면에도 그리스도를 품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대사가 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