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국제소식
미국, 일본, 독일 : 이것은 숀 비즐리(Shawn Beasley)의 삶의 단계입니다. 그의 믿음의 과정은 조금 더 깁니다. 믿음과 발견의 여정에 함께하십시오.
숀 비즐리는 검은 양복을 입고 두 손을 포개어 놓은 채 서부 독일의 새 사도 교회 사무실 앞에 섰습니다. 그는 수염 사이로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세 아이의 아버지가 예배를 영어로 통역하기 위해 독일 도르트문트까지 3시간 30분을 운전해 갔습니다.
비즐리 사제의 모국어는 영어입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거룩한 예배를 통역했을 때,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 “저는 단지 영어로 된 특정한 종교적 용어들을 몰랐을 뿐입니다. 새사도교회 세계에서 나의 모국어는 독일어입니다.“
지구 반 바퀴
숀 비즐리는 보석과 원석 생산으로 유명한 독일의 작은 마을인 아이다-오버슈타인(Idar-Oberstein)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 조지아 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오거스타(Augusta)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1999년 독일에서 새 보금자리를 찾기 전까지 인생은 그를 지구 반대편으로 데려갔습니다.
학교를 마친 후, 숀은 미 해군에 입대했습니다. 그의 근무지 중 하나로 그는 일본 연안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1996년 해군 복무가 끝나자 미국 플로리다로 돌아왔고, 1999년 미 육군에 입대해 이번에는 다른 미군들과 함께 독일로 보내져 아이다-오버슈타인(Idar-Oberstein)으로 파견됐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새사도 교회의 회중이었던 아내 유타(Jutta)를 만난 곳이 이곳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함께 교회에 가자고 초대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탐색
어릴 때부터 숀(Shawn)은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숀은 일곱 살 때 부흥 침례교회에서 스스로 요청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13세 때 그는 1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살았고 일요일마다 아버지의 아내와 함께 감리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 탐색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다양한 기독교 교파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북미 원주민들의 영적 의식을 연구했고 무속인으로 훈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불교와 도교까지 공부했습니다.
도중에 만난 표지판
무엇보다 숀이 새사도교회의 신앙에 대해 인상 깊었던 것은 당시 그의 여자 친구의 신앙생활 방식이었습니다. “유타(Jutta)는 주말에도 막사로 저를 자주 방문했습니다. 일요일에는 항상 교회에 먼저 갔다가 기지에 있는 나를 만나러 왔었습니다.” 그는 또한 예배에 참석하면서 회중 형제자매들에 대해 점점 더 알게 되었고 그들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경험이 있었습니다.
숀은 9.11 테러가 일어나기 불과 2주 전에 군대를 떠났습니다. 숀 비즐리는 “그 결과 그들은 나를 이라크 전쟁에 이라크 전쟁에 파견할 수 없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놀랍게도 그는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독일의 IT 부문에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마침내 집으로
그는 “그때까지, 제 삶은 쉽지 않았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정식 훈련도 받지 않았고, 두 번이나 군 복무를 했고, 두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승률은 내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내가 지금 왜 그렇게 운이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일들이 제자리를 찾았을까요?” 숀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회중의 구성원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그를 주께 인도하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2003년에 인침을 받고 새 사도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게르트 옵덴플라츠 사도는 그를 집사로 서품했습니다. “제 담임사제께서는 제가 교회에서 세례 받던 날 저를 집사로 안수해 주기를 바라는 사랑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께서는 제게 시간을 조금 더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지금 사제가 된 비즐리는 말했습니다. 기나 긴 여정을 마치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 온 그 는 미소는 지어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