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을 받으셨어야만 했을까요?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이 질문은 정당한 질문이며, 그 답변은 명쾌합니다.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고통 받아야 할까요?
위키피디아는 희망이 긍정적인 마음가짐이며 긍정적인 결과에 대한 기대에 기반을 둔다고 설명합니다. 긍정적인 마음가짐, 긍정적인 결과에 대한 기대. 복잡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도 가능할까요? 희망에 관한 정의와 격언은 매우 많이 있습니다. 그 중 바츨라프 하벨의 명언이 있습니다. “희망이란 모든 사태가 호전되리라는 확신이 아니라, 결과의 성패를 떠나 자신의 믿음이 진리라는 부동의 신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희망이십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세례 이후부터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 희망이 바로 11월 새 사도 교회 예배의 인도 주제입니다.
무덤을 넘어선 희망
11월의 첫 번째 일요일. 새 사도 교회는 전통에 따라 고인을 위한 예배를 기념합니다.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희망으로, 생명은 무덤 앞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구원자이시기도 합니다. 죽음 이후에도 도움이 필요하며, 바로 이것이 삶 속에서의 우리를 강하게 해주십니다.
희망의 본질
그리스도께서는 희망이십니다. 알파이자 오메가이십니다. 만물의 시작과 끝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존재가 아닌, 바로 그분이 마지막 말씀을 가지십니다. 우리가 인간의 호의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됩니까.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길 위에서 그들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를 가장 첫 번째에 둡니다. 그분께서 마지막 말씀을 가지십니다. 하지만 신실하게 기도만 하는 것, 혹은 끊이지 않고 특별 헌금이나 헌물을 바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긍정적인 결과에 기반을 둔,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결정적 요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경청, 믿음, 행동을 북돋아주는 것입니다.
위로를 통한 희망
그리스도께서는 희망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어려운 시기에 놓인 믿는 이들의 희망이십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비함을 지키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과 슬픔을 마주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한 진실함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거는 희망은 든든합니다. 여러분이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같이, 위로에도 동참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7) 이 말씀은 고통의 목적에 관한 의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사람들은 왜 고통을 겪어야만 하며, 어디에서 위로를 찾아야 하며, 상황이 변할 것이라는 생생한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인간은 고통을 받긴 하지만, 희망을 허락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위로를 받습니다.
교회력에 따라 새로운 해로 변화
교회력의 마지막 일요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교제라는 희망에 초점을 둡니다. 생명은 헛된 것이 나이며, 죽음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마지막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로마서 5:2)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생애 안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실에 기쁨으로 충만했으며, 자신들의 희망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영어원문 참조 : http://nac.today/en/158033/5229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