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전 주는, 한 순 간의 기쁨 뒤 절망이 찾아오는, 복잡한 감정의 시간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부활을 믿게 하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만 했습니다. 고난. 주님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주간입니다.
새 사도 교회는 3월의 예배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되돌아 볼 것입니다. 3월이라는 시간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슬픔의 사람, 그리스도 예수를 기억하는 시기입니다. 부활절, 이 거룩한 주간에 이르는 한 주 동안, 기독교인들이 일치를 이루는 명백한 때는 그 어느 때도 없습니다. 성탄절 이후의 부활절은 기독교 축전 중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부활절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조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이 표현은 설명이 필요한 표현입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천국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선포된 복음의 깊은 의미는, 구원 혹은 심판이라는 단 하나의 결정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히브리서 4:13) 히브리서에 나온 이 구절은 구원과 심판의 양상을 조명합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인류의 상태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과 유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인 최후의 만찬 원본과 관련해 일화가 있습니다. 다 빈치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레이지 수도원의 식당에 큰 벽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다 빈치는 작품 속 인물들의 적절한 얼굴을 찾는데 오랜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두 명의 주인공은 예외였습니다. 예수님과 유다의 얼굴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평화롭고 온유하며 따뜻함과 다정함을 뿜는 예수님의 특징과 그리고 교활하고, 악의적이고, 간사한 기색을 보이는 유다의 특징을 담기 위해 수 백 가지의 얼굴형을 연구했습니다. 다빈치는 결국 예수님의 모델을 찾았습니다. 밀라노의 한 선원이었습니다. 다빈치는 그 선원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고, 선원에게 그 대가를 크게 치러 주었습니다. 몇 해 뒤, 다빈치는 유다의 모델도 찾았습니다. 고단한 시기를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델의 초상을 본 뜬 그림에 마지막 붓질을 마치자마자 다빈치의 두 눈은 예수를 표현한 그림으로 향했습니다. 다빈치는 깜짝 놀라 작업장을 뛰쳐나왔습니다. 자신이 그린 벽화 속 유다의 모델이 바로 몇 해 전 그린 예수님의 모델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입니다. 몇 해만에 “예수”였던 이가 “유다”가 되었습니다.
두 개의 자세를 취했던 한 남성. 익숙한 이야기 아닙니까? 지킬 박사와 하이드 증후군은 인류 본성의 일부이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우리의 변형된 모든 자아와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생적으로 풍요로운 죄인들
우리는 체념해버려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희생이라는 방식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죄인을 위한 선물입니다. 그 선물 포장을 뜯는 일, 큰 존경심으로 그 선물을 다루는 일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고난의 시작 직전에 제자들과 무리지어 세우신 성만찬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우리 생명에 오늘 날까지도 영양분을 제공해줍니다. 성만찬은 “하늘의 양식”입니다. 성만찬을 통해 믿는 이는 신앙의 길에 강건히 설 수 있으며 악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려주일을 기념합니다. 종려주일은 환호하는 관중 사이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누가복음 19장 28절, 36-38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서서 걸으시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다. … 예수께서 나아가시는데, 제자들이 자기들의 옷을 길에 깔았다. 예수께서 어느덧 올리브 산의 내리막길에 이르셨을 때에,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을 두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였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이렇게 열광하던 군중이 어떻게 일순간에 성난 군중으로 변했을까요…
우리는 성금요일을 맞아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우리를 위해 말 할 수 없는 괴로움과 극심한 고통으로 완전한 구속의 희생을 감내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요한복음 19:30)
<영어원문 참조 : http://nac.today/en/158033/5595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