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새소식
고문틀 주위에 규칙적으로 모여 드는 그런 종교가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의 강한 애착의 초점은 전기의자가 될 것이며, 그리고 채찍은 그들의 예배 장소의 벽에 걸려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그러한 종교 신봉자들의 정신 건강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을 품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들이 현대 기독교 교회에 발을 들여 놓고 다른 모든 것 위에 우뚝 솟은 십자가를 마주하게 된다면 아마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과 유사한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공포의 무기
“위대한” 헤롯 왕이 죽었습니다. 로마의 재무회계사 사비누스는 방금 성전의 보물을 약탈했습니다. 그리고 기원 전 4년에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바루스 총독은 그러한 일들을 간단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는 두 군단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가로질러 나아갔고, 그 과정에서 2천명의 유대인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서기 70년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 되었습니다. 즉, 행정관 게시우스 플로루스는 성전의 보고를 파괴하여 유대인 열심당의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은 신속하게 대응했습니다. 후세의 티투스 황제에 의한 예루살렘 정복으로 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도시는 십자가의 숲으로 거의 둘러 쌓이게 되었습니다. 매일, 로마인들은 500명 이상의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목재가 다 떨어지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괴로움이 엄습.
요점은 희생자가 가능한 한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숨을 거두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팔과 다리는 수평 횡단면이 있는 수직 기둥에 붙어 있었습니다. 손톱은 방사형 뼈와 척골 사이에 있는 손목이나 팔뚝으로 몰렸고, 손바닥을 나무쪽으로 탈구시키기도 했습니다. 발은 대부분 골반이나 발 뒤꿈치 뼈를 통해 기둥에 못을 박았습니다.
팔다리 속의 금속 못은 신경을 손상 시켰습니다. 숨을 몰아쉬고 가라앉힐 때 마다 새로운 고통의 물결이 몸을 타고 밀려오게 됩니다. 자기 몸의 무게로 질식에 이르면서 숨은 더 가빠집니다. 희생자는 경련, 괴저, 극도의 발열, 흉부 및 복강에 액체가 쌓이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어떠한 도움을 청해도 그것은 고통을 연장 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물이나 식초에 담근 스펀지는 탈수로 인한 조기 사망을 막는 것이었고, 희생자가 체중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발 받침대는 조기에 질식사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반대쪽
그리고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지금 이 십자가에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파멸과 재앙이 아니라 구원을 봅니다. 처형의 도구가 아니라, 저 높은 정의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상징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사의 전환점과 겸손의 승리, 죽음의 정복, 영원한 생명의 희망, 그리고 이제껏 살아 왔던 모든 인간을 위해 무엇이든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상징이 그러할 정도로 의미를 바꾼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의 고결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그분께서는 이 유례가 없는 고문과 고통을 사랑과 희망의 상징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말씀으로 이미 분명히 하셨습니다.
탄식에서 찬양까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최종의 포기의 외침이 아닙니다. 시편 22편의 시작은 탄식의 찬송으로 시작하여 찬양의 찬송으로 바뀝니다. “회중 한가운데서 나는 당신을 찬양할 것입니다.”(22절)
이것은 또한 이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희망을 줍니다. 겸손함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서, 심지어 가장 큰 패배일지라도 예상보다도 완전히 다른 수준의 승리로 바뀔 수 있습니다.
사진 : 태양의 위치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독일 데 사우 회중의 유리 십자가